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라크 왕국 (문단 편집) === 독립 이전 === [[파일:Arabia_1905-1923.png]]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자, [[1920년]] [[세브르 조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대영제국|영국]]에게 이라크의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영국은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를 설립한다. 1921년 카이로 평화회담을 통해 이라크에 군주제를 건설하기로 합의,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하여 이라크 왕국을 건설시켰다. 파이살 1세는 이라크에 와 본 적도 없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영국에서 일부로 꼭두각시로 내세운 인물이었다. 파이살은 얼마 전까지만 시리아 왕국의 왕이었지만 영국은 시리아를 프랑스한테 넘기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시리아 왕국은 탄생한지 얼마 안 돼서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조금 더 자세한 사정은 [[시리아 왕국]] 문서 참조. 무함마드의 혈통이란 이름값이 있었지만 이라크 지역 사람이 아닌데다가 실세는 영국이다보니 초기부터 저항이 컸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함께 기도하고 시위'''한다는 유례가 없는 일도 벌어졌다.] 또한 파이살은 수니파였고 이라크엔 시아파가 더 많았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시아파 지역은 수니파 지역은 분리되어 통치되길 바랬지만 영국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질적인 지역들을 묶었다.[* 영국 입장에서 아시리아,쿠르드,시아파 지역등을 따로 관리하면 내륙지대라 관리하기 더 힘들어지고 하나로 묶으면 늘 그렇듯이 세력 간 갈등을 일으키기도 쉬워진다.] 영국은 파이살 1세를 허수아비로 내세운 다음에 시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수니파와 유대인,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이에 반발한 시아파를 중심으로 1920년 바그다드에서 쿠데타가 벌어져 이라크인 453명이 사망하고 영국인도 2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때 영국은 독가스 살포와 민간인 공습 등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라크의 봉기를 진압했다. 이것이 [[윈스턴 처칠]]과 관련된 독가스 떡밥의 시초다. 영국은 계속해서 쿠르드 독립국가 건설,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기독교도, 오스만 제국 관료 우대 정책을 펼쳐 시아파의 반발을 샀고 파이살 1세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시아파와 수니파의 화해, 국방력 건설[* 여담으로 파이살 1세의 국방건설로 인하여 입대한 사람이 다름아닌 [[사담 후세인]]의 알 티그리티 가문이다.], 자주권 확보에 노력하자 영국은 각 부족과 친영파 내각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1932년 이라크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지만 실상은 식민지나 다름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